오피니언 뉴스목록
-
옥산서원 탐방기~@img!!문화유산지킴이 회원들과 옥산서원을 찾은 것은 만추의 서정이 짙게 묻어나는 10월의 어느날 이었다. 경주남산의 마애석불과 괘릉, 양동마을, 옥산리의 정혜사지 13층석탑을 돌아보고 오는길 이었다. 현란한 단풍의 경염(競艶)이 흥겨운 잔치를 마무리 하는듯, 농익은 잎사귀들이 하나둘 지기 시작한다. 옥산서원으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고고한 선비의 지성과 기개를 상징 하듯이, 낙락장송 세 그루가 청정한 운치를 더하니, 우리일행이 예사롭지않은 땅에 들어 섰음을 짐작하게 했다. 한껏 간편한 복장이지만 조신한 자세로 마음을 가다듬고 서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경이로운 것은, 늦가을인데도 울창한 수림으로 하늘을 가리운 진입로 양쪽의 고수거목과 아름다운 계곡의 어울림 이었다. 서원앞을 흐르는 자계천의 옥류하며 시원스러운 너러반석과 기기묘묘한 수석의 경관, 그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서원의 예스러움은 우리를 한폭의 진경산수화 속으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안내하는 문화유산해설사를 따라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우측의 협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정면에는 옥산서원의 편액이 걸려있는 1층 팔작지붕의 강학당, 동서양재인 암수재와 민구재, 그리고 우리가 들어온 정문인 2층누마루의 무변루가 엄격한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후면에는 사당인 체인묘, 신도비각, 판각과 경각등도 질서정연했다. 서원이름을 따온 자옥산(紫玉山)과 마주보는 서향의 자리앉음새로 전학후묘의 구조다. 강학당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이곳에 서려진 세월의 두께를 헤아려 보았다. 옥산서원! 추사의 일필휘지가 사우의 품격을 더하고, 강학공간인 구인당(求仁堂)의 편액은 한석봉의 명필로 그 이름을 빛내니, 그것은 주인이신 이언적선생을 기리는 후학들의 깊고 도타운 정에 기인함이라. 선생은 조선성종22년(1491) 경주의 양동 서백당에서 태어나, 김종직의 문하생인 외삼촌 손중돈에게 사사하였다. 호는 회재(晦齋), 자계(紫溪), 자계옹(紫溪翁)이다. 23세에 문과급제한후 내외직을 두루섭렵하면서 학문과 선정으로 중망을 받았고, 명종 즉위후(1545)에는 원상으로 정국수습과 서정을 주관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다. 말년에는 양제역벽서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유배된후 배소인 강계에서 62세로 돌아갔다. 동국5현의 한분으로 선조1년(1568) 영의정 추증과 함께 문원공의 시호를 받았고, 광해군2년(1610)에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퇴계선생은 회재선생의 학통을 직접 계승하지는 않았지만, 김종직의 적통으로 학문을 계승하였으므로 자신의 학문적 연원을 회재선생에 연결시켰다. 퇴계이후의 영남학자들도 자신들의 학문적 근본을 김종직-손중돈-이언적-이황으로 연결하여, 김종직을 태두로 받들어 왔다. 옥산서원의 맞은편 언덕에는 회재선생이 기거하면서 학문을 닦았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솟을대문이 으젓하고 안채와 사랑채의 구획이 분명한 조선시대 반가의 전통한옥으로, 지금도 후손이 거주하면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 안채에서 뒷문으로 나와 벽채를 따라가니, 담장이 창살로 개방되어 사랑채에서 밖의 자계천경관이 훤히 내다 보이도록 개방해 놓은게 재미 있었다. 근엄한 선비로 학문에 매진하면서도 때로는 자연을 벗하며 우주를 호흡하는 것은 우리선현들의 멋과 풍류였음을 느끼게 했다. 선생은 자옥산아래 이 독락당을 지으면서 “옛날 어진 선비만이 어찌홀로(獨)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의 도를 즐겼고(樂)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라는 맹자의 진심장구를 읊었다 한다. 선생이 가신지 올해로 460년의 세월이 흘렀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으니 허망한게 인생사이기도 하다. 허나 선생이 남기신 고절한 인품과 깊은 학문적 향기는 만세를 두고 우리가슴을 울릴것이다. 자계천 세심대의 청아한 목소리와 준수한 자옥산의 전송을 받으며 옥산서원을 하직하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끝)
-
(기고)수어장대(守禦將臺) 단상~@img!!국향이 무르익어가는 어느 가을날 문화유산지킴이 회원들이 남한산성을 찾았다. 곱게 물든 단풍이 고즈넉한 산성위에 세월의 무게를 얹고 있다. 산행을 즐기는 이들의 알록달록한 복장이 예쁜 단풍과 어울려 황홀한 시절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침괘정에 들러 내력을 듣고 서문에서는 아득한 그때, 눈물을 쏟으며 오랑캐에게 항복하러 나가던 임금행열을 더듬은후 정상으로 향했다. 수어장대에 이르니 수십여명의 군인들이 현장교육을 받는지 구호소리가 요란하다. 노송이 드리운 한켠으로 비켜서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청량산 꼭대기의 솔바람이 상쾌하다. 해발497m의 조그마한 야산이지만, 마치 수천미터의 고봉에 오른 것처럼 전망이 시원하다. 저아래 하남시가 손에 잡힐 듯 지척이고 한강수가 아련하게 다가온다. 남한산성은 찾을 때 마다 감회가 다르다. 무슨 큰 포부나 거대한 담론이라기 보다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슬기와 방법에 관한 궁금증 같은거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중심된 가치관이나 철학은 어떤것인지?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등등...그런점에서 남한산성은 우리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폭넓게 구할 수 있는 학습장이 아닐는지. 우리는 가정이나 사회, 국가를 경영함에 있어, 항상 유비무환의 자세로 오늘을 닦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은 모두 중요하고 특히, 나라의 존재는 절대최고의 가치이므로, 이를 지키고 보전하기 해서는 국민적 역량의 결집과 강화가 전제되어야 함을 귀가 따갑게 들어 왔다. 그런데 과연 역사는 이론과 원칙대로만 흘러 왔는가? 말로는 성인의 가르침이면서 막상 위급한 상황에 처하고, 생존이 경각에 달리게 되면 금과옥조같이 떠 받들던 신념을 헌신짝같이 내 버리는 일들이 너무 많았었다. 바깥의 상황은 신경도 안쓴채, 집안 싸움만 골몰하다가 급기야 혼쭐이 나고만 한심한 일들. 문명이나 문화와는 땀쌓고 살육과 싸움질만 능사로 아는 야만인들이 겁박을 해대는데도, 대책없이 명분만 고집하는 답답함. 그리하여 종내는 힘에 꿀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창피를 당한 어처구니 없는 일들. 섬나라 칼잡이들에게 무려 7년간이나 능욕을 당하고 절치부심 했으면서도, 그로부터 불과 38년후에는 전보다 더 지독한 곤욕을 당한 일들. 이런 뼈아픈 상처의 종합적인 축소판이 바로 여기 남한산성인 것이다. 한번 혼이 났으면 두번다시 되풀이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고쳐서 대비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번번히 멍청하게 당하기만 한다면, 그건 바보천치이거나 아니면 간악하고 지능적인 반역행위이다. 역사가 짧고 얕아서 본받고 깨우칠 대상이 없으면 우정 만들기라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 보고 배울 수 있는 생생한 현장과 훌륭한 역사적 자료가 많은데도, 이를 제대로 활용할줄 모른대서야 말이 않되는 소리다. 우리가 생존을 이루고 있는 현실은 음악과 춤으로 환희 가득한 무도회장도 아니요, 도인과 신선들만 사는 열락의 무릉도원도 아니다. 더욱이 현학적인 설교나 수사학적 논리의 잣대로 재기엔 너무 성글고 강퍅하다. 이념의 총부리가 일촉즉발을 다투고, 위선과 비합리와 추잡한 이욕, 비열한 파렴치와 간교한 술수가 난무하는 혼돈의 좌판인 것이다. 역사를 사랑하고 시대를 근심하는 강호제현들이여! 남한산성 수어장대 앞으로 모이시라! 우리모두 여기모여 376년전 그날로 돌아가 애끓는 역사의 소리를 듣자구요. 섣달 스무나흗날밤 살을 에는 강추위속에 창황망조한채 나무꾼등에 엎혀 남문으로 들어오신 인조임금의 통절한 눈물과 한숨소리. 그리고 한달여만에 곤룡포대신 남색의 신하복장으로 서문을 나가 되놈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한 전하의 피눈물. 용골대의 홍이포가 행궁옆에 꽝꽝 터지는데도, 명분과 실리를 놓고 주화파와 주전파로 대립하여 극렬하게 다투던 모습. 청태종의 송덕비 문안작성을 놓고 서로 않짓겠다고 발뺌하던 선비들. 그리하여 임금의 읍소앞에 엎드려 후세의 지탄을 감수하겠다고 나선 어느 대신의 애끓는 충정. 지금 수어장대앞에 도열한 사랑하는 아들들아! 제군들은 이런 가슴아픈 옛일들을 알고나 있느냐? (끝) (김영칠 약력) o철원부군수와 강원도의원 역임 o한국문인,강원문인,강원수필,강원펜문학 회원 o춘천문화원 문창반 회원 o문화원연합회 강원도지회 사무처장
-
(독자기고)미풍양속 지켜야~@img!!물 폭탄을 쏟아 붓던 장맛비도 그쳤고 가을 하늘이 드높은 수확기를 맞아 가을 들판엔 비바람을 이겨낸 알곡이 영글어 추수가 한창이다.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열흘이 지났고 다음 주엔 민족의 명절인 중추절을 맞이한다. 매스컴은 벌써부터 설맞이 소식을 전하는데 사람들은 기쁨보다 시름이 더 많은 표정이다. 집중호우에 따른 농산물 가격하락에 이어 서민들의 장바구니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추석이 오기 전에 벌초는 물론 찾아오는 가족 친지들도 반갑게 맞아야 할 채비를 해야 한다. 추석은 예로부터 으뜸으로 치는 한민족 고유의 명절이다. 이 날은 소원했던 부모형제와 일가친척들이 만나 조상에게 예를 갖추는 의식을 치르며 떨어졌던 일가친척 그리고 이웃사촌과 정담을 나누는 풍속이다. 이처럼 삶의 가치를 더해주는 추석은 옛 부터 충과 효를 중시하며 살아온 민족의 정서를 깨우쳐 주는 미풍양속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맘때면 어김없이 벌초를 했다. 처서와 백로 사이에 묘소에서 행해지는 벌초는 유교사상을 근간으로 한 우리민속 신앙에서는 조상을 잘 모셔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잡초를 베어내고 묘소 주변을 단정하게 가꾸는 벌초야 말로 조상을 섬겨온 배달민족으로는 소홀히 할 수 없는 가족행사이며 효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제사는 모시지 않아도 남들이 모르지만 벌초를 하지 않으면 금방 눈에 띄어 불효자식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그러나 벌초가 생각만큼 만만치 않다. 대개는 형제들이 날을 잡아 행동을 같이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못생긴 소나무」가 전적으로 도맡아야 한다. 속담에 못생긴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다. 자식이 열인들 무슨 소용 있고 형제 중 고향을 지키는 이가 벌초를 한다는 말이다. 벌초로 인해 형제간 의가 상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형제가 많지 않은 요즘에는 수년씩 벌초를 하지 않아 무연고 묘로 전락하는 경우도 가끔씩 눈에 띈다. 전국의 묘지 중 30%인 600만기 정도가 무연고 묘라는 통계가 어색 할 뿐이며 인터넷에 떠도는 벌초 해프닝은 조상모시기 민족에 먹칠을 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몇 년 만에 작심하고 벌초에 나섰다가 묘지를 찾지 못하고 온 종일 산만 헤매다 왔다는 사연, 기껏 벌초를 다해놓고 절을 할쯤 엉뚱하게도 남의 묘라는 얘기가 요즘의 세태를 말해준다. 벌초는 가족의 행사지만처삼촌 산소 벌초하듯하면 안 된다 .미풍양속 계명에 조상이 내리는 복은 정성을 다함에 있기 때문이다. 화제가 중심을 잃었는지 하고픈 얘기가 헷갈리니 부족함을 탓할 수밖에 없다. 세상사가 변하는 것이 시대의 대세인지라 딱히 역행 할 수 없고 일상이 이상으로 변하는 세태를 부인 할 수 없다. 족보 따윈 안중에도 없고 대신 가족관계 등록부가 등장했다. 복잡 다원화 하는 세태에 따라 그렇다 해도 뭔가 아쉽고 섭섭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엊그제 뉴스 앵커의 첫마디가 인상 깊게 떠오른다. 집중호우 원인을 묻는 질문에 이상기온이 일상기온으로 바뀌었다며 물난리 장면을 보도했다. 추석날 아침 정성껏 마련한 선물 보따리를 들고 부모님과 조상을 찾아 인사하는 것이 미풍양속으로 전해오는 이날엔 이천 만 명이 고향을 찾는 민족의 대이동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 터미널마다 선물 꾸러미를 들고 고향 길을 찾는 모습이 여간 정겹게 않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주변을 경계해야 하는 시간으로 비춰지는 느낌은 비뚤어진 나만의 기우일지 모른다. 주고받는 헤아린 정성어린 선물은 대물림해온 민족의 정서이기에 나눔 문화로 전승되어야 할 아름다운 가치와 지혜로움이 아쉬울 뿐 이다. 과거엔 조상모시기 프로그램도 있었고 자식을 많이 둔 부모에겐 정부가 나서 미역을 사다주기 까지 했다. 6~70년대엔 정부는 산아제한과 혼식을 장려하면서 잘살아 보세! 를 외쳤다. 당시의 표어가 애틋하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자식 열 아들 안 부럽다. 다산을 행복으로 살아온 우리민족이 먹고 살기가 그만큼 힘들었다는 얘긴데 이젠 그때가 벌써 옛날이고 상황은 바뀌었다. 지자체는 저마다 인구 늘리기 정책에 골몰하며 다산을 희망하는 가족에겐 출산장려금과 교육혜택을 제공하면서 출산을 장려하고 있으며 국가시책도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미풍양속으로 전해오는 효 사랑이다. 정성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의 속뜻에는 아름다움을 얘기하고 있다. 어쨌거나 다음 주엔 벌초도 하고 작은 선물도 꾸려야 한다. 지금껏 번듯한 선물하나 장만해 본 적 없지만 말이다. 살다보면 사는 꼴이 우습고 말도 안 되는 일도 허다한데 최근 들어 비리와 부패가 만연한 듯 얘기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했던 간에 아름다움 속에 진실과 정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주고받는 선물조차 부정하는 세태는 이웃사촌을 더 멀게 하고 삭막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화목한 가정은 명절이 더욱 즐겁다고 한다. 가족의 소중함과 조상의 은혜를 되새기는 추석을 맞아 지난시절 광고 속에 비친 「주고 싶고 받고 싶은 마음」으로 정성을 주고받는 사회 미풍을 강조하고 싶다. 한국농어촌공사 영북지사 박종민
-
(기고) 일본은 들어라~@img!!욱일승천기 치켜들고 못된짓 일삼다가 날벼락 맞은지가 엊그제이거늘 무릎꿇고 근신하여야 할 처지에 다시 그 깃발 내세우며 독도까지 너의 땅이라 우겨대는 그 생트집이 가관이구나 런던올림픽을 못보았느냐 우리는 지난날의 우리가 아니라 떠오르는 해이니라. 너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일어설 수 없는 지는 해이니라. 하늘이 지켜보고 있느니라. 바다에서 쓰나미가 땅속에서 지진이 땅위에서 태풍이 바로 그것이니라 그 뿐이랴 북쪽에선 러시아가 남쪽에선 중국이 내땅이라 버텨서지 않느냐 일러두노니 못된버릇 버리고 조용히 살아라 2012. 8. 30 한 길 김 철 배
-
이순신 대교를 건너며~@img!!철원문화원 식구들과 함께 남해안 여행을 다녀왔다. 여수엑스포 구경도하고 남도의 정취도 즐길겸 홀가분한 나들이 였다. 영어(囹圄)의 몸처럼 답답하던 심신이, 남녁의 바람을 쏘이니 자유를 찾은듯 상쾌했다. 우리가 이틀밤을 묵은곳은 경남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의 어느 모텔이었는데, 이곳은 한려수도의 한가운데라 풍광이 그만이었다. 점점이 떠있는 무수한 섬들, 일망무제로 확 트인 전망, 쪽빛바다와 맞닿아 있는 푸른하늘과 흰구름, 고기잡이 배들의 분주한 모습들이 다도해의 미관과 평화를 더 없이 멋지게 그려 주었다. 특히 이곳은 정부가 지난 2006년7월 우리나라 도로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 가운데 대상을 받은곳 이기도 하다. 남해와 사천간 국도3호선인 창선·삼천포대교가 그것으로서, 남해창선도와 사천사이의 섬 네 개를 다섯 개의 다리로 잇는 약 4㎞구간의 연륙교이다. 교량의 디자인도 각기 달라서 삼천포대교는 사장교형태로 양쪽의 주각이 은빛 와이어를 날개처럼 늘어뜨린 위용이 당당했다. 단일아취의 조양대교와 3중아취의 창선대교는 붉은색의 곡선이 매력이었고, 늑도대교와 단향교는 치장을 과감하게 생략한 심풀한 멋이 또한 예술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이 길을 산책하면서 그림같은 절경을 만끽하는 기분은 일품이었다. 이른아침 안개서린 바다를 보노라니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흩어져 있는 오밀조밀한 섬들이 마치 한폭의 수묵담채화를 보는 듯 했다. 삼천포항의 비릿한 생선내음이 코 끝에 와 닿고, 한국의 ‘명품섬 베스트10’의 하나인 신수도와 우리나라에서 해안 일몰이 가장 아름답다는 실안노을길이 물건너에 보였다. 그리고 이 일대 모두는 ‘이순신바닷길’ 이라 할만치 이 충무공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8년동안 충무공은 이곳 바다를 헬수없이 누비면서 왜적소탕에 진력하였고, 끝내 이 바다에서 거룩한 운명을 다하였으니 그 장엄한 순교지가 저쪽 노량인 것이다. 거북선을 은익해 두었던 대방진굴항이 삼천포대교옆에 있고, 거북선 최초 해전지인 선진리가 저만치 물가에 있다. 눈을 조금 멀리 던지면 서포너머에 ‘이순신의 백의종군길’이 질곡같은 역사의 비애를 말해주고 있다. 숙소에서 여수엑스포장을 가는길은 이 명품 연륙교를 지나 사천만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사천대교로 이어진다. 곤양에서 남해고속도로에 올라 서쪽으로 달리는가 싶은데, 어느새 광양으로 접어들었다. 광양만을 꽉 채운 제철산업단지가 보였다. 국가산업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제철의 든든한 뒷받침이, 앞으로 활짝열린 서남해안 시대를 힘차게 개막 하는 듯 해서 뿌듯했다. 여수석유화학단지 또한 우리의 동력과 희망을 확실하게 채워주는 단단한 민족자산이 아니랴!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광양에서 여수반도로 이어지는 거대하고 웅장한 두 개의 교량 이었다. 광양과 여수사이에는 일명 고양이섬 이라는 묘도(猫島)가 있는데, 광양과 묘도사이에 놓인 다리가 이순신대교이고 묘도에서 여수반도를 연결하는 다리가 묘도대교이다. 두 다리 모두 양쪽의 주탑을 와이어가 끌어당겨 균형을 유지하는 사장교 형태이지만, 규모나 투자비 면에서는 확연히 다르다. 묘도대교는 주탑을 지탱하는 와이어가 교각상판의 중앙에 직선으로 연결되어 시각적으로 좀 딱딱한 느낌인 반면, 이순신대교는 연결선이 부드럽게 포물선 모양을 하고있어, 여간 아름답지 않았다. 묘도대교는 주탑간거리 760m로 총연장1,800m에 약 1조원이 들었고, 이순신대교는 주탑간거리 1,545m로 총연장 2.5㎞에 약2조원이 들어갔다 한다. 이순신 대교는 그 이름의 위대함 만큼이나 놀랄만한 기록을 만들었다. 우선 주탑의 높이가 270m로 여의도 63빌딩보다 21m 높고, 주탑간 길이도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길다. 주탑간 거리가 1,545m인 것은 이충무공의 탄신해와 맞춘 것이며, 이 교량들의 완성으로 종전의 80분길이 단 10분으로 대폭 단축되었다고. 두 다리는 당해 지방자치단체가 서남해안 관광개발과 당면한 여수국제박람회의 목적으로 지난 10여년에 걸쳐 추진한 대형 프로젝트이지만, 그 엄청난 재원이 모두 국가의 과감한 지원에 힘입은 것 이라는 점에서, 강원도 백성입장으로는 여간 부럽지 않았고, 한편으로 착잡한 심뇌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끝)
-
(기고)한탄강(漢灘江)과 고석정(孤石亭)~@img!!‘아름다워라 절경 한 구역/ 옛부터 이름난 고석정/ 물이 깊어 검푸르고/ 골은 돌아 몇 굽인데/ 삼백척/ 큰 바위하나/ 강 복판에 우뚝 솟았네 (중략)‘. 노산 이은상 선생의 ’고석정 찬시‘이다. ‘고석정’은 한탄강 계곡의 한 가운데 외롭게 서 있는 큰 바위와 그 옆의 정자를 총칭하는 말이다. 현무암의 기암절벽과 도도하게 굽이치는 강물의 숨결이 철원8경을 빚어 놓았는데, 그 비경의 절정이 고석정이다. 철원은 거대한 용암으로 이루어진 화산고장이다. 태초에 평강의 오리산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그 뜨거운 마그마가 대지를 덮었다. 그리고 가장 약한 부분이 급류에 파이면서 쏟아져 내려간 흔적이 오늘날의 한탄강 계곡이다. 한탄강은 북쪽 평강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의 임진강에 이르는 장장140여㎞를 평균 50m의 수직단애를 만들면서 마치 거대한 뱀처럼 흘러간다. 철원대평원의 한가운데를 깊게 헤집으면서 거대한 골짜기를 만든 자연의 힘도 위대 하거니와, 굴곡의 웅장함과 생김새의 다양함 또한 신비스럽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탄강을 ‘한국의 그랜드 캐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일강이 이집트의 젖줄이라면, 한탄강은 철원의 젖줄이다. 영원한 이땅의 어머니이자, 경건한 신앙으로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다. 철원평야의 따뜻한 젖줄이 되어 수많은 생령들을 살리고 격양가 드높은 풍년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서운 홍수로 포효하여 세상의 나태와 교만을 질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탄강은 위대한 조각가들의 심오한 예술혼이 끼를 펼치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노천전시장이다. 이 경이스러운 계곡에는 물과 흙, 돌과 바람의 자연이 빚은 탁월한 예술솜씨들이 도처에 펼쳐져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기발한 구상이 곳곳에 형상화 되어 있고,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영혼을 넘나드는 명연주가 펼쳐지고 있다. 천지자연의 순수한 멋과 웅대한 파노라마의 감흥은, 이곳을 찾는 이들만이 누리는 황홀한 특권이기도 하다. 한탄강 복판에 물결을 박차고 우람하게 솟아있는 ‘외로운 바위(孤石)’는 가히 신의 솜씨이다. 높이 30m, 몸통둘레 20여m의 단일암석으로 강 한가운데 수직으로 치 솟아 있는데, 접근이 쉽질 않고 바위 정상에는 수령미상의 노송 몇 그루가 청정한 기품으로 운치를 자아낸다. 그 형상은 마치 시대와 역사를 증언하는 고독한 지사(志士) 같기도 하고, 천하절승의 기교를 명곡으로 이끌어 내는 열정의 지휘자 같기도 하다. 하여 때로는 폭포같은 시련을 혼자 몸으로 막아내는 수문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잔잔한 호수위에 실루엣같은 자취를 그리며 세레나데를 들려주는 천사가 되기도 한다. ‘외로운 바위’가 의연한 절조의 선비라면, 그 옆의 고색창연한 ‘고석루’는 맵시 날렵한 여인의 자태로 쌍벽이 되어 경관미를 완성한다. 절벽을 짙게 드리운 울창한 수림사이로, 보일 듯 말 듯 모습을 드러낸 누각위에는 이 땅을 살다간 뜻있는 왕후장상과 영웅, 시인묵객들의 흔적이 서려있다. 일찍이 신라 진평왕과 고려 충숙왕의 어람(御覽)이 있은 이래, 고려의 국통 무외(國統無畏)가 넋을 놓았고, 여말의 이곡과 조선조의 허목은 풍월로 상찬했다. 임진,병자란때는 의병의 함성, 6.25국난때는 적도에 맞서는 끓는 혼의 절규, 썩은정치에는 의적 임꺽정의 분노가 눈물되어 흘렀었다. 오늘날 한탄강에는 아름다운 철제빔의 아취형다리가 몇 개씩 놓이고, 그 위를 고석정에서 출발한 안보관광차량들이 유쾌하게 질주한다. 바야흐로 통일의 새시대를 앞당기는 힘찬 활갯짓이다. (김영칠)
-
(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 역사 얘기~@img!!김 영칠 수필가 요즘 어느 민간방송에서 방영중인 ‘무신(武神)’드라마가 자못 재미 있습니다. 허구와 가식이 섞여 있긴해도 부담없이 즐기는 맛이 꽤 있습니다. 드라마 무신은 고려시대 최씨정권의 얘기인데요. 최충헌이 년로해 죽고 그 아들들 간의 권력다툼에서 장자인 최우가 극적인 반전으로 정권을 잡는 장면들이 흥미를 돋꾸어 주는군요. 현대사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 군사정권의 선례라 할까요. 아무튼 우리역사에는 무인들에 의한 국가권력의 찬탈사례가 심심치 않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군사정권은, 국가가 정치불안과 혼란으로 유지기능을 상실하여 무방비의 약점을 드러낼 때, 무인집단이 정권을 가로채는 행위입니다. 군사정권의 특징은 민주적 합의절차를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인 목적달성과 일방적이며 상명하복식의 복종문화를 생산합니다. 특정 집권자와 몇몇의 두뇌집단에 의해 의사가 결정되는 독재체제로서 그 폐해가 큽니다. 그러나 무인출신 이라도 탁월한 학문적 소양과 식견, 비범한 경영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의 발전과 융성을 가져온 사례도 있는 만큼, 양비론적인 사고방식으로 주관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군사정권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왕건이나 이성계를 그 원조로 보는분도 있고 연개소문이나 고려 무신정권을 시초로 꼽는 이도 있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확실히 이해 해야 할 것은, 국가나 사회체제가 생성되는 고대에는 문무의 확연한 구분이 사실상 어렵다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무력이 국가존립의 가장 큰 힘 이었고, 그 힘은 사회질서 유지의 최대가치 였거든요. 지배자는 유능한 군인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문인의 자질이 필요 하였습니다. 어느 때고 국가위급시에는 칼을들고 전장에 나가야 했고, 싸움이 끝나면 돌아와 통치를 해야 했지요. 우리가 알고있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무려 500여년간이나 힘에 의한 약육강식의 다툼이 벌어져서, 수십,수백의 군소국가들이 나중에는 6,7개로 정리가 되고, 최후에는 시황제의 진나라로 통일되었지요. 이때는 다른 무엇보다도 힘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공자나 맹자같은 성현들의 학문적 이론이 전혀 먹혀들지를 않았습니다. 가까운 일본의 예만해도 풍신수길이 일본전역을 통일하기까지, 100여년동안 군웅들의 하극상과 칼바람이 계속되었지요. 인류역사의 경험에 의하면, 무력 곧 군사력은 국가 존립의 절대적인 요건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문화를 갖고있어도 힘이 약하면 지킬수가 없고, 힘이 없으면 결국 나라를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발해와 백제, 고구려의 멸망, 몽고의 침략과 100년지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탈 그리고 현대사의 6.25전쟁등 숱한 시련이 생생한 증거이지요. 그래서 만주대륙을 석권했던 고구려의 상무정신을 민족혼의 상징으로 숭상하고 힘의 위대성을 긍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그 강대했던 상무혼의 나라가 당나라에 망하였는가? 그것은 막강한 군사력을 받쳐주는 문치의 힘, 곧 국민총화가 결여된 것이 고구려 패망의 결정적 원인이라는데 사가들의 견해가 모아지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비록 무력은 강했지만, 내부의 불화와 반목, 배신이 스스로를 주저앉게 만든 거지요. ‘말위에서 나라를 얻을수는 있지만, 나라를 다스리려면 말 위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력과 문치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가 국가운영의 관건입니다. 힘의 균형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부작용이 생기니까요. 무인들이 전면에 나서고 군사정권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반드시 정치권력의 부패와 추잡한 패거리싸움, 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잃어버린 파렴치한 정부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방황하는 백성이 의지할 곳은 힘을 가진 군부밖에 더 없지요. 앞서 말씀드린 고려의 무인시대는, 극도로 타락하고 무능했던 고려왕정이 스스로의 명을 재촉 하기위해 불러들인 앙화나 다름 없습니다. 장기간의 평화무드속에 지도층이 타락하고 사회기강이 문란해 지면서, 무신을 인간이하로 멸시하고 극심한 차별대우를 계속하자 무인들의 불만이 폭발한 거니까요. 임금의 호위대장이 권신의 막돼먹은 아들에게 수염을 불태우키는가 하면, 대장군이 임금의 놀이개 감이 되어 나섰다가 새파란 문신에게 매까지 맞는 모욕을 받았다면, 감정의 동물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을수 없겠지요. 나라와 백성은 안중에도 없이 주지육림의 쾌락에 빠져 살림을 거덜낸 한심한 임금. 그런 어리석은 군주에 빌붙어 온갖 부귀영화와 권세를 탐한 가증스러운 권신들. 그들이 합작으로 공연한 추잡하고 시건방진 단막극은, 결국 분노한 무신들의 철퇴에 종지부를 찍게 되고, 이후역사는 무지막지한 칼잡이들이 무려 100년을 농단하는 암흑의 시대로 떨어지게 되지요. 그러면서 고려는 서서히 석양으로 기울어 가고요. 역사의 심판은 이처럼 무섭고 냉혹하고 엄정함을 새삼 깨닫게 되는군요.
-
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img!!김영칠 수필가 삼강오륜 하니까 무슨 캐캐묵은 소릴 하느냐고 나무라실 분이 계실줄 압니다만. 그러나 단순히 전통사회의 유물이라고 단정하기엔 아직은 미련이 많거든요. 그리고 적지않은 분들이 잘못 알고 계시거나, 오해를 하고 계신부분도 없지 않구요. 해서 차제에 제대로 좀 알아 보고자 합니다. 삼강오륜이란 말은 나이드신 분들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신 말씀이지요. 수천년을 유교문화속에 젖어온 동양사회,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생활자체가 이 지엄한 논리의 지배를 받아 온게 사실입니다. 삼강오륜은 한몸체로 붙어 다니면서 우리사회의 모든 질서를 좌우했고, 이를 어기는건 사람의 도리를 못한 것으로 낙인찍혀 왔지요. 그런데 삼강과 오륜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것처럼, 하나의 공통된 질서나 의미도 아니고 성질자체도 상반될 뿐아니라, 생성된 목적과 역사도 전혀 다르기 때문에 공존할수 없는 개념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왜 둘이 같이 붙어 다니는가? 유교는 2500여년전에 중국의 공자가 요순우탕(堯舜禹湯)과 주(周)의 모범적인 다스림에서 남겨진 가르침을 집대성한 학문이지요. 공자는 ‘예전문가’로서 천하질서를 예에 입각하여 많은 가르침을 전했는데, 그 가르침의 하나인 오륜이, 정비된 내용으로 명백하게 주장된 것은 맹자(孟子,기원전372-289)에 의해서라 합니다. 오륜 즉, 아버지와 자식은 친함(父子有親)이 있어야 하고, 임금과 신하는 의(君臣有義)가 있어야 하고, 남편과 아내는 분별(夫婦有別)이 있어야 하고, 어른과 아이는 순서(長幼有序)가 있어야 하고, 친구간에는 믿음(朋友有信)이 있어야 한다는 다섯가지 가르침은, 이때 맹자에 의하여 유가(儒家)의 기본윤리로 정립된 거지요. 그 이후 유학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송나라의 주희(朱熹,1130-1200)에 의해 ‘인륜(人倫)’이란 말로 표현 되었구요. ‘오륜’이란 용어는 명나라때에 ‘오륜서’를 편찬 한데서 비롯 됩니다. 삼강의 논리가 나온 배경은, 중국이 전국시대(기원전403-220)를 거쳐 통일작업을 마무리짓는 진시황때로 보고 있습니다. 진시황은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시행하면서, 이사나 한비자같은 법가출신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채용 하였는데요. 법가들은 그물망 같은 법조항으로 체계를 세우고, 전제정치의 틀을 다져야 한다면서, 군신·부자·부부의 관계를 절대 충성과 복종, 순종과 섬김으로 한 세가지를 삼강의 원형으로 제시 하였습니다. 그후 전한(前漢)의 무제때 현량책(賢良策)으로 발탁된 동중서(董仲舒,기원전179-104)라는 유학자가 무제의 정복사업과 통일정책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이름 붙인 것이 ‘삼강’인데요. 동중서는 음양의 원리를 내세워 임금,아버지,남편을 양으로, 신하,자식,아내를 음으로 하여, 양에 대한 음의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 하였습니다. 그래서 군신관계는 임금의 신성불가침성과 신하의 일방적인 충성이었고, 부자관계도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무조건적 순종이며, 부부관계도 아내의 무조건 섬김으로 일방화 하였지요. 삼강과 오륜을 대비해 보면, 오륜은 부자관계가 가장먼저 부각 되는데 대하여, 삼강은 군신관계가 먼저 부각 됐다는점 그리고, 오륜이 사람의 일반적인 인간관계를 규정하고 있는데 대해, 삼강은 군신, 부자, 부부의 세가지 관계에만 한정하고 있는점이 다릅니다. 오륜이 인간본성의 자연스런 발로에 의한, 순수한 인간관계의 기본윤리로서 보완적, 상호관계적, 보편적, 수평적인 특성을 갖는다면, 삼강은 통치기준과 가부장적 지배윤리에 입각한 일방적, 지시적, 수직적, 상명하복의 종속적윤리라는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양자의 이질적 성격은, 각기 다른 시대적 요구와 역사적 배경을 타고 성립 되었음을 알수 있는데요. 결과적으로, 동중서에 의해 삼강의 윤리가 확정 되므로서 무제의 절대왕권이 합리화 되었고, 이를 계기로 유교적 통치권이 작용한 동양사회에서는 어디서나 삼강의 윤리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은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으로, 당초부터 유교를 국교로 하고 유학을 관학(官學)으로 보급하였지요. 그래서 오륜앞에 삼강을 올려놓고 상하질서의 틀을 잡아 나갔습니다. 세종때 간행된 ‘삼강행실도’를 보면, 충신,효자,열녀등 삼강의 모범이 되는 인물위주로 되어 있는데요. 조선조에서는 사회질서 가운데 삼강의 윤리를 우선으로 해서, 이를 어길경우는 매우 엄격하게 처벌하였습니다. 신하로서 임금에 항거하면 역적으로서 본인이 참형을 당하는 것은 물론 삼족을 멸하는 중벌을 내렸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거나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면, 강상죄인(綱常罪人)이라하여 본인 사형과 함께, 해당고을 수령의 파면과 그 고을의 강등, 폐읍조치가 내려졌지요. 시대변화와 더불어 삼강오륜의 올바른 이해를 통한, 현대적인 해석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김영칠)
-
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img!!김영칠 수필가 성군 세종대왕의 장자 ‘이향(李珦, 1414-1452)’은, 여덟살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29년을 후계자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몸이 허약하여 재위2년만에 돌아가니, 그가 조선조 5대임금 ‘문종’입니다. 문종은 지나치게 착하고 어진 문약함이 있었지만,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 덕분에 뛰어난 학문적 소양을 지닐수 있었습니다. 세종말년에는 7년간 대리청정을 하면서, 측우기의 제작과 군사제도를 개혁하는등 강한 의욕을 보이기도 했는데, 너무 일찍 붕어하는 바람에 높은 꿈을 펼쳐 보지못한 한을 남겼습니다. 그에게는 스승이 두분 계셨는데, 이분들은 조선조 500년역사 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선비들 이었습니다. 기이하게도 두분의 호가 모두 강호산인(江湖山人)으로, 1419년(세종원년) 같은해에 증광문과에 나란히 급제하여 환로(宦路)에 나섭니다. 두분 다 조선성리학의 학통을 있는 대유(大儒)들로서, 불의를 용납않는 강한 소신과 공사의 그릇됨을 좌시 하지않는 대쪽같은 기개를 갖고 있었지요. 세종이 이런 강골의 선비를 세자의 시강관으로 선택한 데는, 세자의 유약한 성품을 강한 기질로 고쳐보려는 깊은 뜻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두분 선비가 보여준 고결한 품행과 거침없는 충언도 일품이지만, 걸출한 선비를 아끼고 감싸안은 세종역시 영특하고 위대한 군주라 하겠습니다. ○ 김숙자(金叔滋 1389-1456)선생 12세때 성리학자인 길재에게 소학과 경서를 배웠고, 31세에 문과급제한후 주로 성균관에 있으면서, 후학들 교육과 세자의 시강관을 겸했습니다. 그는 스승 ‘길재’로 부터 정몽주의 학문을 이어받아, 그것을 아들인 김종직에게 전함으로써 조선도학의 전통을 잇습니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절차를 중시하여 기본바탕의 확립과 체계적인 학습을 강조 하였습니다. 예를들면, 부모형제와 스승에대한 사랑과 존경, 벗과의 우정과 믿음을 읶히지 않으면 다음단계를 가르치지 않았지요. 경전을 배우는데 있어서도, 과목을 뛰어넘거나 줄이지 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순서대로 읶히도록 했습니다. 경전의 해석은 단장취의(斷章取義, 문구를 자르거나 뽑아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를 엄히 경계하고, 반드시 경서의 가르침과 원칙을 지키도록 가르쳤지요. 그러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에만 전념 하지말고, 실행과 실천을 중시하여 학문과 수신의 균형을 강조하는 등, 융통성있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도학에 바탕한 선생의 올곧음은 흙탕물같은 벼슬길에는 거슬리는 점이 많아, 1455년 세조가 즉위한 후에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한후, 제자들의 강학에만 전념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벼슬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산림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한 선생의 만년은, 조선도학의 큰 물줄기를 만든 고고한 선비의 참모습 이기도 합니다. ○ 최만리(崔萬理 1398-1445) 문과성적 우수자로 청요직(淸要職)인 홍문관에 보임됩니다. 잠시 강원도관찰사로 외직을 다녀온 외에는, 학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20여년간 집현전에서 학문연구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인지등과 번갈아가며 왕세자(문종)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가르침이 엄격하면서도 자상하여 전임 시강관으로 임명을 받지요. 선생은 성격이 활달하고 직설적이면서 대꼬챙이 같은 원칙론자 였습니다. 1441년(세종23)에는 ‘흥천사의 사리각 중수반대’등,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한달동안 무려 여섯차례나 올릴 만큼, 직언과 상소를 가장 많이 한 신하로도 유명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의 상소문 내용에 “부처를 섬긴 역대의 임금은 본받을수 없는자”라는, 과격한 표현이 들어 있었는데 세종은 이를 탓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1444년(세종26)에는 소두(疏頭,상소대표자)가 되어 저 유명한 ‘훈민정음반대상소’를 올립니다. 이 상소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 의금부에 갇혔다가 다음날 석방되는데, 그 즉시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한후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흔히들 선생을 ‘훈민정음반대자’로 여기고 있는데, 사실은 훈민정음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집현전 좌장으로서 한글로 된 새로운 한자음의 표기가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않음으로 인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라 합니다. 청렴강직한 성품으로, 벼슬이나 재물에는 관심없이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면서도 두주불사의 대주가여서, 세종은 별도의 술잔을 하사 할 만큼 선생을 아꼈습니다. 사후에 청백리로 녹선 되었구요. “현명한 이가 재물을 탐하면 큰 뜻을 해치고, 어리석은 이가 재물을 갖게 되면 잘못을 더한다”. 누옥(陋屋)에 걸었던 선생의 좌우명 입니다. (김영칠)
-
(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 역사 얘기~@img!!김영칠 수필가 인생사에 있어서 ‘사제의 만남’처럼 소중한 인연도 없을줄 압니다. 좋은 만남으로 감동적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어긋난 운명으로 가슴아픈 일도 있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양녕대군과 변계량선생의 만남이 불행한 관계였다면, 이번에는 매우 행복한 만남을 소개합니다. 고매한 인품과 높은 학문으로 제자를 계도한 스승, 그리고 스승의 높은 뜻을 깊이 이해하고 부응하여 위대한 보람을 만들어 낸 제자, 그리하여 돈독한 사제관계가 일생동안 한결같았던 아름다운 인연이 우리역사에 남아 있지요. 바로 세종대왕과 이수선생의 만남입니다. 이수(李隨, 1374-1430)선생은 자가 택지(擇之), 호는 심은(深隱)으로 봉산이씨(鳳山李氏)의 시조 입니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성균관 생원시험에 1등 할만치 머리가 우수했지만, 어쩐일인지 대과에는 번번히 낙방하고 포의로 있을 때, 열살의 어린 충녕대군을 만납니다. 선생이 33세 되는 1407년(태종7) 태종이 성균관 대사성 유백순을 불러, 생원중에서 효령과 충녕의 두왕자를 가르칠 선비를 추천하라고 명합니다. 이에 유백순은 “생원 이수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학문이 정숙 합니다”라고 추천 하지요. 그런데 선생은 두 대군을 가르친지 얼마 되지않아, 과거 공부를 이유로 사양하고 돌아 갑니다. 그러나 또다시 낙방하고 초야에 묻혀 지냈는데, 태종이 도승지를 보내 다시 불러 올립니다. 선생이 올라오자 태종은 옷 한 벌을 하사하며, 두 대군의 공부를 각별히 부탁 하는데요. 충녕은 확실히 남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글씨쓰기와 그림그리기, 악기연주등 예술방면에도 두루 재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던지 부왕이 독서 금지령을 내릴정도 였습니다. 내가 경서와 역사서는 보지않은 책이 없다”고 할 정도로 자타가 인정하는 학구파였기에, 왕세자 양녕의 시강관이었던 변계량선생은 충녕의 공부자세를 무척 부러워 했다 합니다. 충녕은 요동치는 궁정사와 거리를 둔채, 신중한 처신으로 오직 글공부와 덕행을 쌓는 일에 전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서열상으로 왕세자와는 무관한듯 했지만, 객관적 예상을 깨고 대권의 행운을 잡을수 있었던 이면에는, 인간 이도(李祹, 충녕대군의 이름)의 탁월한 품성과 지혜로운 자질, 그리고 각고면려의 노력이 크게 작용 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난 옥을 갈고 다듬어 찬란한 광채를 내도록 이끌어준 큰 스승, 이수선생의 깊이있는 가르침과 계도가 숨어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 같군요. 선생이 대과에 급제한 것은 그의 나이 41세때인 1414년(태종14)이니까, 성균관 생원시험에 1등 합격한 때로부터 무려 18년후가 됩니다. 학문과 인품이 도저(到底)한 시강관 임에도, 대과에 번번히 낙방한걸 보면 학문의 깊이와 시험은 별개 인것 같기도 합니다. 대기만성이란 말처럼 선생은 비록 늦게 출발 하였지만, 벼슬길은 탄탄대로 였고 승승장구 하였습니다. 황해도 관찰사를 필두로 의정부부참찬,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중용되었지요. 그러나 인생사 호사다마라! 선생이 병판으로 있던 어느날, 술에 취한 상태로 말을 타다가 그만 실수로 떨어져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 선생의 나이 57세. 스승의 부고를 들은 세종은 거애(擧哀, 머리를 풀고 곡을 하는 것)하고 3일동안 조회를 정지 시켰지요. 그리고 부의와 함께 교서를 보내 스승의 별세를 진심으로 애달파 했습니다. “경은 학문이 정밀하고 넓으며, 행동이 단아하고 방정하였다. 태종께서 경을 백의로 등용하시어, 내가 어렸을때에 가르침을 받았다...이제 경을 심복으로 삼아 길이 의지하고 귀감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어째서 하늘은 경을 급히 빼앗아가서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가. 이에 소복을 입고 슬프게 곡하며, 따로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노라. 슬프다. 생사의 무상함은 운명이라 피할수 없지만, 은의가 이미 지극하니 살고 죽음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스승에 대한 세종의 존경은 극진하고 돈독해서 수시로 스승의 가르침을 경청했고, 스승의 품계와 예우를 배려하는데 한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합니다. 선생또한 추호도 어긋남 없이 겸손한 자세와 지극한 정성으로 임금을 모셔서 조정의 귀감이 되었다 합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선생에게는 문정공(文靖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 되었지요. 성군을 배출하는 것이 모든 시강관들의 꿈이자 최고의 영예 였다면, 선생이야말로 조선 최고의 성군을 가르친 행복한 스승이라 하겠습니다. (김영칠)